■ 학고개와 밤골 북덕말
▲ 학현3리
복덕말
학현리는 안중읍에서 포승으로 가는 길의 첫 동네다. 이 마을은 원학현, 율리, 신학현으로 형성되었다. 원학현은 학고개라고 부른다.
본디 해방 전까지만 해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옛날에는 황새와 학이 깃들었다.
황새나 학은 상서로운 새여서 지명에 큰 영향을 끼친다. 도일동 상리마을 입구나 문곡1리 마을을 황새울이라고 하는 것이나 이 마을을
학고개또는 하오개라고 하는 것은 다 그런 이유에서다. 학고개는 60~70호쯤 된다. 하지만 마을이 산 능선을 따라 흩어져 있어서 공간이 넉넉해
보인다.
성씨는 본래 성(成)씨가 마을을 개척했지만 몇 집 안 남았고, 현재는 함평 이씨, 박씨, 이씨, 엄씨가 섞여 산다. 학고개 마을은
성안말과 학고개(하오개)로 나뉜다. ‘성안말’에는 마을 뒤 취수장 근처에 성벽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지제동 태미산성 안쪽 마을을
‘울성’이라고 하듯, 성안말이라는 지명도 성벽과 관련되어 만들어졌다.
성안말의 성벽은 석정리 장성(長城)의 일부이다. 석정리 장성은 본래 조선시대 포승면 홍원리에 있었던 ‘홍원목장’에서 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쌓은 것인데 그 시작점이 안중읍 학현리였다. 성안말 앞은 해방 전후만 해도 바다였다.
농경지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바닷물이 유입되던 건조한 갯벌은 소규모 간척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게와 가래만으로 마을
앞을 간척하였다.
간척한 땅에는 이름이 붙여졌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 지명은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이정표였다. 그래서 작은 골짜기,
손바닥만한 들판에도 이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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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학현하오개 | ||
바돈은 1955년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였다. 그래서 인천 옹진에서 새우젓을 팔러 오는 배들이 닿았다. 이곳으로 들어온 새우젓은
안중장을 통해 팔려나갔는데, 마을 사람들도 추수 때 벼나 보리로 갚기로 하고는 사먹었다.
율리의 우리말 이름은 ‘밤골’이다. 예로부터 평택지방에는 밤나무가 무성하여 밤과 관련된 옛 지명이 많은데 이 마을도 그런 경우다.
밤골의 다른 이름은 ‘배미’다. 이 지명은 평택시 합정동에도 있다.
합정동 평택고등학고 앞 동네가 그곳이다. ‘배미’는 ‘논배미‘, ’밭 배미‘하듯이 뱃머리처럼 밖으로 돌출된 지형을 말한다. 이 같은
지명은 바다와 인접한 지역에 많다. 이 마을은 대대로 김녕 김씨가 마을을 이루고 산다. 김씨들은 지금도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는데 마을의
경제기반이나 사회주도층도 이들이 소유하고 있다.
신학현은 북덕말이다. 어떤 사람은 복덕말이라고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북덕말이 맞는 것 같다.
지명에서 ‘덕’은 언덕을 뜻한다. 그렇게 해석하면 북덕말은 북쪽 언덕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은 학현리에서 가장 나중에
형성되었다. .1917년에 발행된 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원학현과 구별하여 신학현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김봉익 효자 정문
850년 된 은행나무
자랑거리 가득한
학현마을
성안말 성벽은
석정리 장성의 일부
해방 전후까지
배 드나들던 바다
■ 학현리엔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학현리 북덕말에는 김봉익의 효자정문이 있었다.(2002년 소실됨) 이 정문은 1669년(현종 10년)에 건립된 것으로 효자 김봉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것이다.
김봉익은 생몰연대는 정확치 않지만 대략 17세기 초 쯤의 인물로 판단된다. 이 사람은 본래 학현리에 살았는데 심성이 곱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 번은 어머니가 부스럼으로 고생을 하여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하였지만 효과가 없어 애를 태우는데 친구의 꿈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나타나 비법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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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학현은행나무 | ||
할 수 없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매가 나타나서는 입에 물고 있던 꿩을 던져주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꿩을 잡아서
드시게 했더니 금세 병이 나았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멧돼지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산 속에 들어가서 10여일을 찾아
헤맸지만 잡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밤 쿵 하는 소리에 밖에 나가봤더니 호랑이가 멧돼지를 잡아서 마당에 던져 놓은 것이 보였다. 김봉익은 호랑이에게
감사하며 멧돼지를 잡아 아버지께 드렸다.
그 후 부모가 돌아가시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며 장례를 치렀고, 바깥출입을 삼가고 소식(小食)을 하며 3년 상을 정성껏 받들었다.
이와 같은 효성은 조정에도 알려져 1663년(현종 4년) 사헌부 지평(정 5품)의 관직이 내려졌으며, 1669년에는 유림들의 천거로 효자정문이
하사되었다.
김봉익 효자정문과 함께 학현리를 상징하는 것은 학고개(하오개) 은행나무다. 이 나무는 수령이 850년이나 된 거목으로 높이가
29미터, 둘레가 8미터에 이른다. 본디 거목(巨木)에는 신령함이 깃들어 전설과 설화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이 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명종 때 정치는 문란하고 농민들은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에 노비가 되거나
유리걸식하였다. 이 때 젊은 스님 한 분이 학고개를 넘게 되었다.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삼면이 바다였던 학현리는 성(成)씨들 대 여섯
집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의 지형을 살피던 스님은 그날 밤 남편을 잃고 홀로 사는 여인의 집에 하룻밤 유숙을 청하였다.
여인은 단칸방이었지만 스님을 박대할 수 없어 치마로 칸막이를 하고는 스님의 요청을 승낙하였다. 기나긴 밤 치마로 칸막이를 한 방에
젊은 과부와 하룻밤을 묵게 된 스님은 끊어 오르는 욕정에 몸을 뒤척였다.
그는 욕정을 참느라 속으로 불경을 암송하고 염주를 열심히 굴렸지만 한 번 끊어 오른 마음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스님은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잠든 여인의 몸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소스라치게 놀란 여인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스님의 경망한 행동을 준엄히 나무랐다.
스님은 부끄러움에 학고개 한복판에 있던 우물가에서 목욕재계하고 수행을 하였지만 끝내 득도하지 못하고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을
측은히 여겨 죽은 자리에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학고개 은행나무다.
구전설화가 그렇듯 이 전설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구조가 스님과 정절을 지키는 여성을 등장시킨 것으로
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야기 구조에 조선후기의 사회인식이 첨삭된 것으로 보인다. 어째든 마을 중앙에 수 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전설과
설화가 살아 있는 마을은 정겹다.
■ 근현대와 학현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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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학현성안
학현리 사람들은 스스로 교육열이 높다고 자부한다. 농업이 주산업이고 이농현상으로 60대가 청년인 마을이지만 교육열이 높아 상급학교
진학률이 높고 사법고시 합격자도 나왔다고 한다.
이 마을의 교육열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적인 유학과 근대학문의 괴리에서
갈팡질팡할 무렵 학현1리 밤골마을에는 강습소가 개설되었다.
학현리가 고향인 김학규(77)씨는 1937년 쯤에 개설된 것으로 기억했는데, 설립주체는 밤골의 김녕 김씨들이었다고 말했다. 당시엔 안중초등학교가 있었으므로 이곳엔 초등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거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모였다. 교과과정이나 내용은 초등학교와 대동소이했지만 일반 교과 외에도 붓글씨와 한문공부를 했던 것이 다른 점이었다.
학생은 대략 30명 가량이었다. 교사는 김학규씨 사촌형님이었던 김용규씨와 박선생님이란 분이 가르쳤다. 강습소는 원학현 학고개에도
있었다. 이 학교는 율리강습소보다 늦은 1943년에 개설되었다. 하지만 일제 말의 강습소 교육에서 민족교육을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일제의 군국주의
교육에 순응하는 형태였다.
학현리에서는 두, 세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대안리로 이주하여 사는 김학규(77) 씨의 사연은 눈시울이 붉어지게
하였다. 김학규씨가 살아온 시대는 일제 말 징용, 징병이 판치던 시대였고, 해방정국의 좌우익 갈등, 한국전쟁의 고통이 수반된 시대였다.
취학연령이었던 일제말기에 김학규씨 집은 가난했다.
마을 대부분의 땅은 같은 집안이었던 김형옥씨 것이었지만 친척이라고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학교는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니다
그만두었다. 일을 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조부께서 마을에 한문서당을 열었지만 낮에 일을 하고 밤에 공부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많이 공부하지
못했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김학규 씨는 인민군이 내려오자 의용군 입대를 피해 도망다녔다.
집안에서도 어떻게든 장남만은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결국에는 견디지 못하고 둘째 아들을 형 대신 입대시켰다. 동생은 나중에
인민군을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만 5년 전에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그래서 김학규 씨는 동생과 동생 가족에게 부채의식을 갖고 산다.
영원히 갚지 못할 마음의 큰 부채인 셈이다. 그리고 그 부채(負債)는 우리세대가 나누어야할 것이기도 하다.
항상 그리운 고향 학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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